출 생 일 : 1895. 순 교 일 : 1950. 10. 27 교단 : 장로교
한영서원 졸업
서천, 한산, 김제, 장성 등지에 사숙에 교원생활
1933년 평양신학교 졸업(28회)
영광읍교회, 덕산교회, 상촌교회, 영산포읍교회, 염산교회
김방호는 1895년 경북 경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어릴 때 잠시 한문 서당에 나가 글을 읽었을 뿐 커가면서는 농사를 지었다. 1919년 그의 나이 스물네살에 3.1운동이 일어났고, 경산에소도 대대적으로 만세 운동이 펼쳐져 김방호 부자도 함께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부르다가 그의 부친(김기삼)이 총탄에 맞아 급서하였다. 부친의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그는 만주로 피난해 용정에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산악훈련을 마친 뒤, 잘생긴 얼굴과 구변 좋은 적살이 남보다 특출하다 하여 군자금 모집책이 되었다.
함경북도 삼수갑산 지방을 출장하던 중, 찬송가 소리를 듣고 부흥회하는 교회에 찾아가서 처음 듣는 설교인데도 은혜로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부흥회를 계기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부흥강사 목사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는 순간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되며 나딩굴어져 온 밤을 울었다.
"주여. 독립군이란 명목으로 무수한 생명을 살해한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제자로 삼으소서. 당신의 아들로 삼으소서" 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며 풍진에 찌든 때를 씻듯, 눈물로 가슴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부흥강사의 소개로 한영서원(미국 남 감리교 후원으로 윤치오 선생이 설립한 학교)을 졸업하고, 전남지방 닫슨 선교사의 조사로 많은 노력을 했고, 소룡리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장로가 된 김방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26회로 평양신학교 졸업 후, 영광읍교회, 덕산교회, 상촌교회를 시무하던 중, 8.15해방을 맞았다. 김 목사는 영산포교회에서 6.25가 일어나던 1950년 3월까지 시무하다가 염산교회로 ㅤ옮겨 목회하던 중, 6. 25를 맞아 교인들이 목선을 준비하고 피난을 권했지만, "목사가 어떻게 목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까?" 하며 막무가내였다.
김 목사의 큰 아들은 목포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50년 10월 27일 지방 빨갱이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고 미군스파이로 몰려 김 목사의 여덟식구 (부인, 5남매, 손녀)가 한 날 순교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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