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許詳, 1878~1950) 장로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예수 믿기 전에는 술주정꾼으로 광주에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주독이 들려 코가 딸기코로 변해 버릴 정도였다. 어느날 그는 동생 허화준(許華俊)이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내 동생이 목사(
그는 동생이 고급 관리가 된 줄 알고 그 길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39세였다. 동생을 위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결국 신앙의 포로가 되어 술, 담배를 끊고 광주 양림교회가 집사가 되었다. 겨울 농한기가 되면 그는 광주 오원기념각에서 개최되던 달성경학교에 매년 참가하였고 3년의 과정을 이수하였다. 전남노회에서는 이런 그의 신앙심을 인정하였고 그는 1936년 57세의 나이에 전남 영광군 군남면 군남교회 전도사로 초빙을 받고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농촌에서는 농한기가 되면 가을 내내 애써 추수했던 쌀가마니를 내어 놓고 잡기로 패가망신한 농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이들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화투 놀이에 빠졌고, 한 번 빠지면 마치 아편에 중독된 사람처럼 빈 손으로 화투 방을 나오곤 했다.
이러한 농촌 실정을 파악한 허상 전도사는 군남교회에서만 사역하지 않고 염산교회의 초빙을 받아 초대교역자로 섬겼다. 강대상에 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불을 품어 쏟아내는 듯한 강렬함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교회에 모여들었다.
어느덧 그가 시무했던 염산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그 혼자 전도사의 신분으로 사역하기 어려워졌다. 원창권목사를 초빙하여 당회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염산교회를 떠나지 않고 장로가 되어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다.
이후 염산교회는 부흥, 성장하였다. 1950년 정월을 맞이하여 사경회를 개최하며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는 손양원 목사를 강사로 청빙하기도 하였다. 염산교회는 영광군 내에서는 손꼽히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결국 허상 장로도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부인과 함께 순교했다. 인민군들은 나머지 염산교회 교인들을 둑방에 모아 놓고 손목을 묶은 후에 모두 밀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서 한 목소리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라고 찬송하면서 순교하였다. 이때 허상 장로와 부인 이순심(李順心) 집사도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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